세종시 충정사에서 만나는 청백리 이명 선생
조선시대 청백리 이명 선생의 정신을 만나다
조선시대에는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를 일컬어 ‘청백리(淸白吏)’라 칭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칭찬을 넘어 한 집안의 명예를 결정짓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습니다. “3대가 영의정을 지내는 것보다 1대가 청백리 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러한 청백리의 이상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명(李蓂, 1496~1572) 선생입니다. 조선 중종과 명종 대에 활동한 문신 이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정사(忠貞祠)가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충정사, 금성산 아래 자리한 유교 사당
충정사는 금이산성이 있는 금성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정사 진입로에는 한적한 농촌 마을 농로에 충정사 진입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충정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 마주하는 외삼문인 ‘예성문’은 충정사 전체 공간의 출입구 역할을 하며, ‘예성(禮城)’은 예의를 지키는 울타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성문을 지나야만 충정사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는 유교적 절차를 반영한 것으로 방문객에게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예성문이 잠겨 있어 출입이 제한됩니다.
예성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나타나며, 내삼문에는 ‘충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경건한 제향 공간과 일반 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천상(天), 인상(人), 지상(地)의 의미를 담은 전통 사당의 구성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충정사와 이명 선생의 삶
세종시 향토문화연구소 윤철원 부소장은 충정사와 이명 선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충정사는 1902년(고종 39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85년에 중건되었으며,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충정사 앞 안내판에는 이명 선생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이명 선생은 예안(禮安) 본관으로 연산군 2년(1496) 현감 이보간의 아들로 태어나 152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좌의정까지 올랐습니다. 40년간 재직하며 을사사화 등 어려움을 겪었고, 권력자의 횡포에 맞서 상소를 올리는 등 목숨을 아끼지 않은 기개를 보였습니다. 명종 6년(1551)에는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입니다.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할 때도 여색과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충정사의 구성과 역할
이명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는 감실(龕室)은 신주를 보관하는 작은 나무상자 형태입니다. 충정사 옆에는 ‘숭모재’라는 별도의 재실 공간이 있습니다. 숭모재는 선현을 숭배하고 사모하며 머무는 장소로, 제사를 준비하거나 유림들이 학문을 논하는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이는 충정사의 정신을 교육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명 선생의 후손과 기념
이명 선생의 후손인 예안이씨 대종회 이준태 이사님은 명종 실록 등에 기록된 이명 선생의 행적을 담은 '정간공 휘명 약전'과 사진 자료를 제공해 더욱 깊이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2016년 9월 6일에는 이곳에서 후손들이 제를 모시고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안이씨는 전의이씨에서 분파하였으며, 현재 전의면과 전동면 일대에 후손들이 정착해 살면서 충정사에 제를 모시고 이명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당현천 당현루 전망대 인근에는 이명 선생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명 선생의 청백리 정신
이명 선생은 단순히 높은 벼슬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권력보다 양심을, 안위보다 정의를 택한 인물로 존경받습니다. 그의 삶과 선택은 오늘날에도 되새겨야 할 가치가 가득합니다.
- 권세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명종 초 권신 이기의 전횡을 탄핵하는 등 용기 있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 1553년 이조참판으로서 을사사화로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의 신원을 회복할 것을 주장해 현실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 청렴을 실천하며 고위직 제안에도 물러서고, 70세에 은퇴를 요청하는 등 모범 공직자의 자세를 지켰습니다.
이명 선생의 묘와 신도비
이명 선생의 묘는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있으며, 1983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묘역 동남쪽에는 그의 일생을 기록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1574년(선조 7년)에 세워졌으며, 김귀영이 글을 짓고 신충겸이 글씨를 썼습니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사후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명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충정사를 세웠습니다. 이는 그의 삶과 정신이 시대를 초월해 귀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청백리 이명 선생의 가르침
이명 선생의 삶은 청백리라는 칭호를 넘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도덕적 나침반을 제시합니다. 청렴, 정의, 용기의 가치를 실천한 그의 이야기는 세종시 전동면 송성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충정사를 방문해 그 정신을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충정사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